본문 바로가기
그 길위에

오래된 산수 낯선풍경

by 해바라기 님의 블로그 2025. 5. 12.


오래된 산수 낯선 풍경 김호민 작가 전통 산수화 속에 텐트가 등장한다. 조선 화풍을 따르던 종이에 러버덕이 떠다닌다. 경계의 철책 너머, 한적한 해안에는 귀여운 오리 한 마리가 정박해 있다. 김호민 작가의 산수화는 익숙한 붓끝의 흔적 속에 낯선 시대의 삶을 은근히 끼워 넣는다. 전통이라는 경계 안에서, 그는 어떻게 ‘지금’을 기록하고 있을까.
전통 속으로 돌아가다
“자개장에 그려진 산과 동물을 따라 그리던 아이였죠.”김호민 작가의 회화 인생은 아버지가 하시던 자개 공방에서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그는 조각 문양을 낙서처럼 흉내 내며 기초를 익혔고, 만화가의 꿈을 키우던 청소년기를 지나 미술부 활동을 계기로 회화의 길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서양화를 꿈꿨지만, 집안의 권유와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한국화과로 진학했고 이 선택은 이후 그의 예술적 정체성과도 깊이 연결됐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 그는 다양한 재료 실험과 채색화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점점 화려해지던 화면은 어느 순간, 본질에 관한 질문을 남겼다. 그때 떠오른 것은 ‘과거를 읽는 것이 미래를 여는 길’이라는 믿음. 그는 다시 수묵과 한지, 전통 기법으로 돌아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모사하며, 전통 회화가 품은 정신과 품격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중국 유학 시절, 수묵화가 민족 정체성과 예술철학을 함께 담아내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수묵이 한국화의 중심에서 사라지고 있었죠. 그래서일까요. 저 혼자 청개구리처럼 다시 그 길을 밟기 시작했어요.”


전통 산수의 문법 위에 현대의 장면이 하나둘 등장했다. 작가가 좋아하던 캠핑의 기억, 여행의 추억, 텐트, 오토캠핑카, 그리고 귀여운 러버덕 인형까지.

“산수는 그대로인데, 거기 사는 사람과 풍경은 달라졌죠. 그러면 나라도 지금의 사람으로서 지금을 살아가는 풍경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지에 수묵채색
전통적인 겸재 정선의 구도 위에 캠핑 장면을 겹쳐 그린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작품 속에서 텐트 옆에 불을 지피는 가족, 옛 산수 속을 유영하는 러버덕 캐릭터 ‘오리선생’은 현실이자 은유이고, 기록이자 유희다. 오리선생은 평화와 위로의 존재로서 산수와 함께 유람하며 감상자에게 말을 건넨다.

한벽원미술관 전시에서는 아예 산수화를 확장해 실제 캠핑장을 미술관 내부에 옮겨왔다. “산수화 안에 들어가 본 적 있나요?”라는 질문처럼, 관람객은 그림 밖에서 ‘와유(臥遊)’하던 전통 회화를, 그림 안에 들어가 앉아 유람하는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분단과 경계 그리고 기록
최근 그의 시선은 ‘접경지’로 향하고 있다. 동해안과 서해안, 특히 강원도 고성 같은 분단선 주변의 해안을 따라다니며, 철책 너머의 비경을 그림으로 옮긴다.

“아름다운 풍경엔 철책이 있어요. 그건 아이러니한 현실이지만, 저는 그 장면을 기록하고 싶어요. 역사의 상흔이 담긴 땅이야말로 진짜 산수 아닐까요?”

작품 속의 오리선생은 그 풍경을 함께 유람하고, 밤이 되면 어선들과 함께 정박한다. 마치 고요한 위로처럼, 무심하게 머물며 시대와 사람의 아픔을 함께 바라본다. 작가는 오리선생을 통해 감상자에게 말없이 동행하는 존재를 그리고 있다. 상처 입은 풍경을 ‘지나가는 이’가 아니라, ‘곁에 있어주는 이’로 바라보게 하는 회화적 장치다.


그에게 전통이란 단절된 과거가 아니다. 전통은 삶을 닮은 흐름이며, 기억과 감각이 담긴 ‘감성의 유전자’이다. 그는 그것을 한지와 수묵, 옛 기법을 빌려 꺼내되, 지금의 풍경과 삶을 통해 다시 써내려간다.

“산수는 그대로이지만, 그 안에 담기는 사람과 이야기는 바뀌죠. 전통과 현대는 서로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존재 같아요.”

그는 오늘도 흐르듯 그림을 그린다. 잔잔한 먹빛으로 산을 그리고, 가볍게 웃는 오리선생을 불러 넣는다. 그 풍경엔 오래된 산수와 낯선 오늘이, 뜻깊고 힙하게 나란히 놓여 있다.

[Profile]
김호민 Kim Ho Min
광주예술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한국화학과,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루쉰미술학원 중국인물화공작실에서 수학한 작가는 2024년 한벽원미술관 초대개인전을 비롯해 16회의 개인전을 했고, 280여 회의 단체전에 참여하며 한국화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2002),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1998)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정부미술은행, 광주시립미술관, 성남문화재단, 큐브미술관, 양평군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거제시문화예술재단, 아트뮤지엄 려 등에 다양한 작품이 소장돼 있고 중앙대, 성균관대, 상명대, 성신여대, 전남대, 조선대, 경남대에 강사, 겸임교수로 출강했다.

2024 《오리선생 산수유람기》, 한벽원미술관
2019 《피서전》, 이천시립 월전미술관
2018 《DMZ전》, 김포문화재단 미술관
2017 《성남의 얼굴전》, 큐브미술관
2016 《한중서화교류전》, 칭다오시립미술관
2015 《광주아트페어》, 김대중센터
2014 《남한산성전》, 큐브미술관
2013 《갤러리 썬 초대전》, 갤러리 썬
2012 《한국화 조망전》, 광주시립미술관



글 최대규 | 사진 고인순 | 작품사진 김호민 작가 제공
국가유산청 2025년 4월호 게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