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울게 안 할게…시대를 넘는 양푼이의 우정
송수연의 뾰족한 세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어도 고3은 힘들었다. 하지만 공부나 성적과 무관하게 가장 재밌었던 때도 고3이었다. 고3 봄부터 나와 친구들은 매주 일요일 후배들이 나오지 않아 텅 빈 맞은편 건물에 잠입해 양푼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누구는 밥, 누구는 야채, 누구는 참기름과 고추장……. 우리의 비빔밥은 날로 발전했고, 마지막 한 숟갈을 두고 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이후 숱한 비빔밥을 먹었지만, 그때 그 맛을 내는 비빔밥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순일중학교 양푼이 클럽’의 예은, 보민, 종희, 시래도 커다란 양푼과 함께 별관 다목적실로 숨어든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된 아이들은 양푼에 비빔밥과 빙수를 만들어 먹는다. 갖은 재료를 담아 비비고 섞으면서 아이들의 고민도, 앞이 보이지 않는, 그래서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사건들도 절묘하게 길을 찾아간다.
누구의 강요도 아닌, 자신이 좋아서 결정한 예은의 ‘처음’(첫 경험)은 예은에게 생각지 못한 당황과 공포를 남긴다. 너무 빨랐다는 후회가 찾아왔지만 돌이킬 수 없었고, 예은은 구명조끼 하나 없이 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것만 같다. 무엇보다 “함께 저지른 일인데도” 한주는 예은과 함께 바다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모래사장에서 예은을 바라보며 예은에게 밧줄을 던져주는 인명구조 요원에 가깝다는, 그 까마득한 간극을 예은은 이해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내가 독자로 가장 몰입한 이야기가 바로 예은의 스토리다. 예은이 좋아서 선택한 처음, 폭력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았던 관계, 그럼에도 발생한 좁힐 수 없는 간극. 예은의 이야기는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관련, 우리가 논의하고 숙고해야 할 수많은 과제를 남긴다.
이 소설이 다루는 아이들의 고민과 고민을 낳은 사건은 대한민국의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날그날 먹은 디저트를 올리는 행복한 트위터 계정을 운영하는 보민이 어쩌다 ‘프로아나’가 된다거나, 모범생이자 공붓벌레인 종희가 무책임한 부모 때문에 흔들리는 이야기는 언제든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시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공부나 진학에 전혀 관심이 없고 날마다 방에 틀어박혀 영화만 보는 시래는 어른들이 보기에 한심한 학생일 수 있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솔직한 인물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가슴 설레는지를 찾아가는 시래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난다.
소설을 다 읽고도 나는 한참 앉은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양푼이 클럽의 캐치프레이즈 “혼자 울게 두지 않을 것”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다. 학교에서 우리는 친구를 만나고, 울고 웃고 다투면서 우정을 쌓는다. 나와 다른 사람,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 힘들기도 하지만, 그 다름이 양푼 속에서 섞이고 섞여 예상하지 못한 기막힌 맛을 내는 비빔밥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학교는 무한한 다름이 어떻게 잘 섞일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체험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얼마나 악하고 비뚤어진 아이들이 있는가를 보여주고 고발하는 이야기보다, 이토록 다른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며 잘 섞여 들 수 있는가를 말하는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청소년소설이 아닐까. 시대를 뛰어넘는 양푼이의 우정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