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팔월의 고래

마치 오래된 필름을 돌려보는 듯한 영화다. 화면은 느리게 흐르고, 인물들은 천천히 움직인다. 출연진은 모두 주름 깊은 배우들. 그런데도 묘하게 빠져든다. 낡은 더빙 영화처럼 음성이 화면과 약간 어긋나는데, 그 어긋남마저 정겹다.
인물들은 연극하듯 또박또박 대사를 뱉고, 간혹 등장하는 늙은 남자들의 굵고 울림 있는 목소리는, 조용한 장면마다 무게를 실어준다. 이 영화의 무대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 섬, 그리고 그 섬 한가운데 서 있는 집—사라의 집이다.

메인 섬, 언덕 위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하는 집은 언니 사라의 집이다. 창문 너머로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햇살이 가장 먼저 닿는 그 집엔 주황색 스웨터를 입은 사라가 산다. 밝고 따뜻한 색처럼 그녀도 생기 넘치는 사람이다. 매일 아침 정성스레 바닥을 쓸고, 창틀을 닦고, 바람결 따라 춤추는 커튼마저 반듯하게 정리하는 그녀는 부지런함이 일상이 된 사람이다.
정원엔 야생처럼 자라난 듯하면서도 어딘가 질서가 느껴지는 꽃들이 피어 있다.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자연스레 묻어나는 그곳은 사라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 걷는 걸음은 느려졌지만, 하루하루를 꽉 채워 살아내는 삶은 여전히 단단하다.
남편 필립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47년. 매해 그날이면 사라는 보라빛 드레스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 남편 사진 앞에 와인 한 잔을 올려놓고, 조용히 마주 앉아 둘만의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마치 지금도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리비는 더 이상 세상과 자연스럽게 관계 맺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이다. 시력을 잃고, 남편을 잃고, 삶의 윤곽이 사라진 후엔 세상을 향한 믿음도, 기대도 내려놨다. 그랬기에 사라가 여전히 삶에 정성 들이는 모습이 마냥 미련해 보인다.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 그 안의 느릿한 시간 속에서 리비는 냉소와 비관이라는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 버틴다.
그런 리비에게 마라노프는 낯설고 불안한 존재다. 떠돌이 귀족, 어디선가 스쳐 지나온 외부의 냄새. 그는 사라의 삶에 기웃대는 누군가로 보이고, 사라가 그런 인물에게 여지를 주는 것처럼 보이면 리비의 불안은 더 깊어진다. 마라노프와의 고래 이야기를 듣고 리비가 날을 세우는 건, 그저 질투나 과민 반응이 아니라, 자신이 더는 사라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거기다 티샤까지 끼어든다. 겉으론 친구지만, 실은 또 다른 제안자. 더 현실적인, 더 냉정한 선택지를 들고 나타난다. 티샤의 말은 틀린 게 없다. 사라와 리비 둘 다 불안한 노후를 살아가고 있고, 티샤와 함께 사는 건 그 불안을 덜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 제안은, 결국 리비를 삶에서 덜어내는 일처럼 들린다.
결정적인 밤. 리비는 끙끙 앓으며 사라를 부르지만, 위층의 사라는 듣지 못한다. 그리고 다음 날, 티샤와 부동산업자가 등장하고, 리비는 점점 무너진다. 자신이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절정에 달한 순간. 하지만 사라는 그 집을 팔지 않기로 한다. 선택은 리비였다.
그제서야 리비는, 사라가 여전히 곁에 있음을 체감한다. 아침, 머리를 빗겨달라는 어린애 같은 요청은 삶의 가장 단순한 바람이다. 그리고 반대하던 전망창 공사를, 자신이 먼저 제안한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빛을 보겠다’는 그 태도는 사라로부터 배운 삶의 방식이다. 그렇게 리비는, 조금씩 사라의 방식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