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위에

농민의 거친 손마디가 빚어낸 자연유산의 가치 명승남해 가천마을 다랑이 논

해바라기 님의 블로그 2025. 5. 11. 21:02


인간의 피땀 어린 노력과 자연환경의 조화
경사진 땅을 이용해 돌을 쌓고, 물길을 돌려 경작지를 일군 다랑이 논은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 순응했던 인간의 역사이기도 하다. 특히 남해 가천마을의 다랑이 논은 설흘산과 응봉산 자락의 급경사지에 계단처럼 층층이 펼쳐진다. 무려 100여 층, 680여 개에 이르는 논이 바다를 향해 굽이치듯 내려앉은 모습은 마치 거대한 자연의 수묵화처럼 느껴진다. 멀리서 바라보면 굽이치는 논의 곡선이 춤을 추며, 물이 가득한 시기엔 푸른 하늘을 담고, 모내기철에는 연초록의 생명이 차오르며, 가을이면 황금빛 물결이 일렁인다. 이 모든 장면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지는 자연과 인간의 합주 같다.

다랑이 논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지형과 기후, 사람의 손길이 복합적으로 얽힌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서 존재한다. 경작의 효율을 넘어 마을공동체의 지혜와 협력이 오롯이 녹아든 결과이기도 하다. 논과 논 사이를 연결하는 좁은둑길은 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다져졌고, 논배미마다 놓인 돌담은 손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린 흔적이다. 자연의 지형을 거스르기보다는 그 결을 따라가며 질서를 입힌 풍경은 단순한 농경지를 넘어선 삶의 터전이자 자연과 공존해 온 문화의 표현이다.

남해를 마주한 다랑이 논은 바람결 따라 물결처럼 굽이치며 바다의 수평선과 이어진다. 새벽이면 옅은 해무 사이로 풍경이 비치고, 해 질 녘이면 노을빛이 그 위에 내려앉아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자연이 그린 빛의 농담 위에 사람의 손길이 닿은 선들이 얹혀 그곳엔 담담한 숨결과 생명의 기운이 동시에 담겨 있다. 단순한 경작지를 넘어 땅과 사람, 시간이 만들어 낸 대표적 자연유산이다.


농민들의 손으로 빚어진 자연유산의 가치
농촌은 흔히 풍요롭고 한적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넉넉한 들판과 여유로운 일상, 계절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흐름이 어우러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다랑이 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농민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연달아 나는 바람에 부러지는 벼 이삭 소리는 들판에 내리쬐는 햇살만큼 풍요롭다. 여행자의 손끝으로 옮아가는 카메라 셔터음은 바다 내음과 함께 아름다운 풍경으로 멈춰진다.

하지만 남해의 급경사지를 일구어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얻기 위해 돌을 나르고 흙을 다지며 살아온 주민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땀과 숨결은 층층이 쌓인 논배미마다 스며들어 있다. 농민의 거친 손끝으로 오랜 세월 이어온 다랑이 논에는 그 인내와 노고가 고스란히 서려 있다.

그 아름다움은 단지 풍경에 머물지 않는다. 계절마다 땀을 쏟아낸 농민들의 단단한 손마디가 고랑 하나하나에 살아 숨쉬고 있기에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자연과 함께해 온 삶의 기록이자, 일상을 견디며 지켜낸 시간이 켜켜이 쌓인 남해 가천마을 다랑이 논은 오늘도 묵묵히 삶의 일부분을 감내하고 있다. 그리고 그 풍경은 다음 세대를 향해 손길을 내미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 된다.

글 전다슬(제주특별자치도 자연유산위원) | 사진 셔터스톡